임산부 배려석에 대하여
오랜만에 탄 1호선,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냄새가 난다.
1호선을 타면 괜히 귀를 감싸고 있는 헤드셋을 벗고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다른 노선에서는 특별하지 않은 일들이 1호선에는 별나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선입견인가 생각하는 찰나,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반대편에 자리가 나자 신속하게 자리를 옮긴다.
민첩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건강한 모습이다.
자리를 옮기고 안도의 빛을 보이는 할머니를 보며, 본인도 사회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계신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생각이 마무리되기도 전. 다음역에서 탑승한 할아버지가 신속한 할머니가 앉아있던 자리를 바통 터치한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할아버지가 임산부 배려석을 인지하지 못하고 앉으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할아버지에게는 그저 똑같은 빈자리였다. 더 나아가 할아버지는 임산부 배려석이라는 개념을 아예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조금 불편한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임산부 배려석이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임산부 배려석이 취지에 맞게 이용되는 비율은 50% 이하다. 만원일 경우에는 확률이 더 내려간다.
물론 임산부 뱃지를 부착한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람도 많지만 충분하지 않다.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 것과 비켜줘서 앉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더욱이 비좁은 공간에서 자리를 바꿔 않는 행동은 오히려 여러 사람에게 불편함을 끼친다.
현재 임산부 배려석 시스템은 모두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미 차있는 자리를 양보받는 임산부, 비어 있어서 앉았지만 괜히 눈치 보는 사람 마지막으로 임산부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바라보는 다른 승객들까지 모든 구성원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추가적으로 뱃지가 있는데 굳이 임산부 배려석이 있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임산부라면 어떤 자리건 양보받아야 마땅한데 임산부 배려석의 존재로 오히려 양보받는 좌석이 한정된다.
이럴 거면 그냥 임산부 칸을 물리적으로 분리시켜 모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낫다. 열차 한 칸이 너무 넓다면 한 구역이라도 전체를 분홍색으로 칠해버리는 거다. 물론 역차별 등 이슈가 있을 수도 있지만 임산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배려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두 번째는 임산부 배려석의 도덕적 잣대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말 그대로 배려석이다. 배려해야 하는 좌석이지 꼭 비워두거나 비켜줄 필요는 없다. 따라서 인산부 배려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어도 그 사람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행동은 분명 내 도덕적 가치관과 맞지 않지만 논리적으로는 전혀 틀린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이 느낌이 꽤 불쾌하다.
지하철에는 임산부 배려석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교통약자석이 있다. 마찬가지로 앉는 사람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알다시피 현재 교통약자석은 노인전용석에 가깝다.
교통약자석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어르신들이 모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둔소둔 이야기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교통약자석은 이미 노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교통약자석은 임산부 배려석과는 달리 자리가 비어있어도 굳이 앉으려고 하지 않는다.
교통 약자석에 앉아있는 게 어색한뿐더러 해당 문화 사람이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물리적 공간의 구분이다. 교통약자석은 딱 분리가 되어있다. 일종의 선이 그어져 있는 느낌인데 사람이 많아 서서 가는 경우에도 그쪽은 어르신들이 많다. 그에 반해 임산부 배려석은 일반석과 붙어있어 교통 약자석만큼 심리적인 거부감이 크지 않다.
따라서 임산부 배려석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좌석을 물리적으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통약자석처럼 심리적 거부감과 도덕적 잣대를 자극할 수 있을 만큼의 큰 영역이 필요하다.
하나의 아이디어는 열차 한 칸에 띄엄띄엄 지정되어 있는 가장자리의 모든 배려석을 모아 아예 한 줄로 배치하는 것이다. 크기에서 오는 힘은 확실히 있다.
출산율 세계 최하위 대한민국. 이 정도 ㅂ려는 사회적 합의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임산부 배려석은 도덕성을 너무 믿는 형태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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